며칠 전 삼성의 Ostrich(2017)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꽤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를 보고 나니 한참 오래전에 안드로이드의 Monotune(2016)이라는 광고도 봤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두 개가 형식이 꽤 비슷했습니다. 마지막에 기억할 만한 문구로 마무리한다는 점은 거의 똑같더군요. 그래서 두 개를 같이 놓고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교와 해석 전에, 광고를 보고 떠올랐던 나의 ‘생각의 원자’들을 복원하고 싶습니다. 이 ‘원자’들은 최대한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나에게 꽤 가치 있습니다.
1. Ostrich
많은 타조들 한 마리가, 왠지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인간의 건물을 봄.
찻잔, 음식들이 있는 인간의 식탁에 다가가 음식을 한 입 먹음.
VR기기를 의도치 않게 착용하게 됨.
구름 속 세계를 VR기기가 보여준다.
타조가 놀란다. 동공이 커진다.
깃털이 부풀면서 날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뛰어다닌다.
다른 타조들이 놀라서 본다. 타조는 날려다가 땅에 쳐박힌다.
낮에도 밤에도 연습한다.
VR을 벗은 상태에서 어느 날 햇빛이 비추는 배경에서, 나는 데 성공한다. 날고 난 뒤의 타조는 그림자로 보여진다.
문구 - We make what can’t be made So you can do what can’t be done #DoWhatYouCan’t
2. Monotune
피아노 건반이 확대된 앵글에서 피아노를 친다. 모노튠 상태. 월광 소나타를 침. 조금 앵글을 멀리에서 보이게 한다. 뒤통수, 팔, 그 손을 찍고 있는 카메라, 피아노 일부가 보인다.
인간은 열심히, 진지하게 친다.
앵글이 더 멀어지고 피아노 두 대가 보이게 한다.
뒤돌아서 리얼 피아노를 친다.
빌로우뷰로 인간의 얼굴 보여준다.
음악은 처음부터 치는 걸 병렬로 보여주는 건 아니고 이어서 친다.
또 뒤돌아서 븅신 피아노를 친다.
셈여림, 리듬, 모든 걸 열심히 친다.
뒤돌지 않고 바로 리얼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곧바로 오버랩된다.
또 뒤돌지 않고 곧바로 오버랩된다.
몇 번 반복. 문구가 뜨면서 마무리. be together, not the same.
해석과 비평
광고의 제목은 각각 오스트리치와 모노툰입니다. 오스트리치는 하나의 생명이며, 모노툰은 구성된 상태입니다. 타조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보고, 놀라고, 욕망하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타조는 광고 내부에서 상태를 갖고 변화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작품의 초점이 그 생명체의 ‘경험’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는 당연히 생각 같은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피아노는 ‘조작되어지는 개체’입니다. 피아노는 목적을 위해 제작된 물체이고, 연주자의 입력에 따라 결과를 산출합니다. 다시 말해 피아노는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며, 그것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경험하는 개체’들에 의해 생각되어집니다. 광고의 제목은 하나의 인간에 의해 조작되는 것의 결과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각각의 광고에서는 당연히 광고를 보는 주체들을 배제할 수 없는데, 첫 번째 광고에서는 ‘오스트리치’가 ‘VR기기를 구매하게 될 고객’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타조가 VR을 보고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보고 욕망하는 것처럼, 관객도 그를 욕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노툰’은 그 자체가 광고를 보는 주체로 내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관객의 대리물일까요? 피아노일까요? 건반일까요? 광고 마지막에서의 문구를 고려하면 ‘모노툰’은 광고를 보는 주체의 합으로도 생각될 여지가 있습니다. ‘같이 있는 것’은 인간들이며, ‘같이 있는 것’은 각각의 건반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을 각각의 ‘건반들’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건반은 스스로 어떤 음을 낼지 정하지 않지요. 누군가에 의해 눌러집니다. 따라서 “다양한 인간”을 나타낸다고 읽히는 각각의 건반은, 사실 영상의 존재론 안에서는 완전히 타율적인 객체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두 번째 광고에서 인간은 ‘조작되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피아노를 치는, ‘조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할이 여러 대상에 분산되어 있지요.
두 광고 모두 강한 대립항을 통해 세계를 압축합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날게 되는 것, 혹은 그렇지 못하는 것.’
‘모노툰으로 투닝되어 있는 것, 똑바로 되어 있는 것’
둘 모두 한쪽에 명백하게 긍정적인 보상을 줍니다. 도전은 도전하지 않는 것보다 좋고, 차이는 동일성보다 좋습니다.
두 광고 모두 이분법을 갖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치에서는 A->B로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모노툰은 A와 B를 (하나의 시점에서)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며 비교합니다.
오스트리치는 다른 타조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타조가 이상한 행동을 할 때 쳐다보고, 마지막에도 비행하는 타조를 봅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회입니다. 자아의 변화가 타인의 시야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 그림자는 나는 일종의 지도의 영토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행위가 다른 개체들에게 ‘요약되는 것’이지요. 이때 광고의 문구와 결합해서 생각하면, ‘We make what can’t be made’에서 can’t be made는 그림자이며 요약되는 것이며, ‘We make’는 그와 대비되는 실제 행위로 보여집니다.
모노툰에서는 인간이 딱 하나뿐입니다. 광고 문구는 be together, not the same.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Together / not together로, same / not same으로 세상을 생각할 수 있다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는 네 가지입니다.
Together/same. 이것은 함께 있고 같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Together/not same. 함께 있고 다릅니다. 좋습니다.
Not together/same. 떨어져 있고 같습니다. 광고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Not together/not same.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고는 표면적으로 same이나 different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투게더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는 선택은 왜 고려하지 않지? 에 대한 대답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멍청한 사람은 시끄럽고, 똑똑한 사람은 조용하다. 그래서 세상은 멍청한 말로 시끄럽다.”
두 개의 이분법이 있습니다. 똑똑함과 멍청함, 조용함과 시끄러움입니다. 두 축을 교차시키면 ‘똑똑하면서 조용한 사람’, ‘똑똑하면서 시끄러운 사람’, ‘멍청하면서 조용한 사람’, ‘멍청하면서 시끄러운 사람’이라는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문장은 그 가운데 ‘똑똑함+조용함’과 ‘멍청함+시끄러움’만을 서로 연결한 다음 세계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도 말을 하면 멍청해진다. 그래서 세상은 멍청한 말로 시끄럽다.”
여기서는 ‘똑똑함’과 ‘멍청함’이 더 이상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두 종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이 말을 한다는 사건에 의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움직일 가능성이 생깁니다.
Together / Not together, Same / Not same이라는 두 개의 축을 사용하면 네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고는 그 가운데 ‘Together+Same’과 ‘Together+Not the same’을 가져와 전자에는 부정적인 값을, 후자에는 긍정적인 값을 부여합니다. 두 개의 이분법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언뜻 복잡한 모델처럼 보이지만, 두 변수가 서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아노는 처음부터 모노툰이거나 정상적인 피아노입니다. 한쪽이 다른 쪽으로 되어가는 과정도 없고, ‘함께 있음’이 ‘같음’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며, ‘다름’이 ‘함께 있음’을 변화시키지도 않습니다. 가능한 세계를 네 칸으로 나누어 놓은 뒤 그중 하나에 좋은 표시를 하고 하나에 나쁜 표시를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광고가 보여주는 복잡성은 변수의 개수에 비해 상당히 정적입니다. 칸은 여러 개지만, 칸 사이의 운동은 없습니다.
반대로 오스트리치의 표면적인 이분법은 오히려 훨씬 단순합니다. 날지 못하는 것과 나는 것. A와 B 두 개뿐입니다. 그러나 광고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칸 자체보다 그 사이입니다.
오스트리치는 적은 수의 범주를 가지고도 그 범주 사이의 변화를 보여주고, 모노툰은 더 많은 논리적 범주를 가지고도 그 범주들을 고정된 상태로 남겨둡니다.
…
ceteris parib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대략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하나의 요인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기 위해, 다른 조건들은 같다고 가정하거나 가능한 한 통제해 놓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두 상황에서 거의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만들어놓고 단 하나의 조건만 바꾸었는데 결과가 달라졌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낸 원인으로 바뀐 조건을 지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광고 전반에 깔린 전제는 일종의 ‘근대적 합리성’의 한 이미지라고 느껴집니다. 과학적 모델입니다. 똑같은 곡을 아주 똑같이, 동일한 리듬과 셈여림으로 치는데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원인이 될 만한 인자만 달랐을 때 그 인자가 바로 원인이라고 지목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브랜드의 신념을 일종의 과학적 실험의 외형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숙명이라고 할까요? 중립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분석할 계산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모델이 발견할 수 있는 세계는 모델을 만든 사람이 미리 설정한 것에 구속됩니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틀에 일단 올라탄 다음, 그 틀을 사용했을 때 흡족할 만한 결과들을 발견하고, 그 틀을 신봉하게 되는 ‘개악질 양성피드백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동일성이 모든 건반이 같은 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다양성은 각 건반이 서로 다른 음을 내는 상태입니다. 모든 음이 C인 피아노가 월광 소나타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험 설계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결과로 나왔다고 해도, 당연히, 전혀 신기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각각 미리 정해진 기능과 음정을 가진 건반에 비유하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도대체가 인간과 맞지가 않습니다. 각 부품이 자신에게 할당된 차이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을 실험에서 멋있게 보여주어 봤자 그것이 ‘아름다운 인간의 자율성의 하모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스트리치는 ‘통제되지 않은 세계’로 보입니다. 왜 하필 그 타조가 선택되었을까요? 왜 그 순간 인간의 건물을 보았을까요? 왜 식탁으로 갔을까요? 왜 먹다가 VR이 머리에 씌워졌을까요?
전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우연입니다. 이야기의 출발점에는 설명되지 않는 contingency, 우연성이 있습니다. 일종의 ‘낭만’이지요. 행위자가 아직 개념화하지 못한 것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우연히 찾아온 욕망에 충실하는 것. 내가 몰랐던 구름에, 행위에, 가능성에 매혹되는 것.
공기역학을 계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나에게 일어난 현상을 보고 그것에 압도되는 것입니다. 한 존재가 사건을 겪으며 이전에는 아니었던 무엇인가가 되어버리는 세계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상태와 변화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
하지만 ‘열려 있음,우연성,자율성’ 등을 미학적으로 더 높은 가치라고 이미 전제한 뒤, 그 기준에 잘 맞는 오스트리치를 승자로 만드는 것은 별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반동적이며 유치하고 엉성하며 미국적이고 프로파간다적이고 시대역행적인 광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쁜 광고라고 자동으로 결론이 도출될 수는 없습니다. 그 광고를 만든 인간이, ‘건반은 안드로이드의 OS의 통합을 의미하며, 인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 니가 나서서 인간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광고는 물건을 팔아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관점에서는 오스트리치는 ‘조작된 우연’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우연’이라고 속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악질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노골적이고, 강압적이며 불쾌할 수는 있어도 오히려 ‘세련되지 않은 촌스러운 선전’이 오히려 정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